-사회적 동물에게 소셜미디어라는 마약.
우리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 생각해보자. 자신에게 아무런 사람이 없다고. 부모님도, 친구도, 선생님도 없다고 해보자. 그럼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 것인가. 우린 각자의 삶 속에서 역할이 있다. 그러한 역할을 통해 우리는 서로 관계 맺고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그런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어느날부터 SNS가 유행했다. 이제는 유행이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커다란 삶으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한 순간도 놓치기 아쉬운 연극을 서로 보여주느라 바쁘다. 바로 좋아요를 눌러준다. 올린지 얼마 안 된 게시물의 반응을 스크롤을 내리며 걱정하고 또 확인한다. 하루를 넘어 매 순간마다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스토리’라는 기능은 짧은 순간도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잘 다룬 소셜미디어 기능이다. 당신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한 욕망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사회적 욕망 속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좋아요의 수와 팔로우 수, 구독자 수가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버리게 되었다. 자신 스스로 존재하기보다 타인의 인정 속에서 존재하고 싶어한다. 매 순간 스토리와 피드를 업데이트한다. 시시각각 좋아요를 통해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낀다.
-계속해서 동조화하는 동물.
가장 우려스러운 점이자 동시에 기대되는 점은 우리는 서로에게 동조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공감능력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같이 고통스러워할 수 있으며, 함께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사랑과 증오까지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SNS와 같은 공간을 조심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지혜롭지 못한 행위와 가치관 증오와 비난의 마녀사냥이 떠다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관이 단단하지 못한 사람은 쉽게 동조하여 나쁜 가치관의 올라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 가치관을 통해 성장할 수도 있다.
꿀벌의 사례를 들어보자. 꿀벌은 집에 식량이 다 떨어지면 남은 식량을 모두가 조금이라도 나눠 먹어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이타적인 곤충이다. 이타적인 마음에 함께 동조된다면 우리는 서로를 함께 위하는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떠올려보자. 당신에게 없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 새벽부터 거리를 청소해 주시는 환경미화원 분들부터 커피를 건네주는 카페 종업원, 버스기사님, 식당 아주머니, 다쳤다면 의사 선생님까지.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동조하면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소셜 알고리즘은 패거리 심리학을 최절정으로 만든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을 선호한다. 나와 비슷한 취미, 소득수준, 가까운 지역, 생활 습관, 소비 습관, 식습관 등. 친한 친구들과의 DNA를 살펴보면 DNA도 조금씩 닮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한 선호도는 편한 분위기라는 안정성에서 나온다. 우리는 안정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관계에서도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은 일종의 위험 신호이다. 긴장하게 되며 불편하다. 그러한 불편은 약간의 고통을 동반시킨다. 고통은 갈등을 유발할 수 있으며 갈등은 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든다.
이제는 ‘SNS’뿐만 아니라 모든 소셜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알고리즘이 작동한다. 비슷한 선호도의 콘텐츠와 집단을 계속해서 소개한다. 그래야 플랫폼 안에서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해당 기업에 대한 매출에도 이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공룡 기업이 계속해서 이 거대한 온라인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라도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쿠키가 먹고 싶다면 알고리즘은 쿠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쿠키 맛집을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운동을 좋아한다면 운동 유튜버와 가까운 헬스장과 필라테스장을 알려줄 것이다. 이렇듯 당신의 모든 행동은 플랫폼에 알고리즘 예상 범위 안에 있게 된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앞으로 계속 내가 선호하는 방향의 인생으로만 살게 된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편협한 사람으로서 살게 될 위험이 높다는 의미다.
-깊어진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있다.
점점 더 편협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자신에 선호도에 따라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취향과 개성은 뚜렷해질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부족해진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 도덕의식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역사책 또한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더 많은 차별이 생겨날 것이 뻔해 보인다. 그 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소속감을 느끼며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깊어진 다양성 만큼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다.”
‘음모론자는 언제나 가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음모론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뜻밖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에 지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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